지난 10년간 배터리 전기차 개발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1회 충전 주행거리를 늘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0년대의 안정적이던 산업금속 가격과 산술적인 배터리 중량당 에너지 밀도 향상에 힘입어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 팩의 통상적인 용량은 꾸준히 증가되어 왔다. 대략 10년 전, 소형차 위주, 20kWh 전후의 배터리를 탑재하여 소규모로 판매되던 배터리 전기차 시장은 현재는 50~80kWh 정도의 용량이 메인스트림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트렌드에 중요한 요인이 하나 생겼으니, 유동성 확대와 서플라이 체인 불안정, 그리고 전란 등에 전반적인 산업금속 가격의 급격한 상승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2020년 이전부터 산업금속과 농산물을 포함한 원자재 시장이 2020년대에는 거대한 하락의 슈퍼사이클을 마무리하고 장기적인 상승 추이를 보일 것을 예측하였던 바 있는데, 지금 현재의 급등세는 아래 그림에서 ‘새로운 논리’라고 표기된 단기 고점일 가능성이 있고, 앞으로도 큰 폭의 조정과 상승의 진폭이 있겠지만, 거대한 유동성이 제거될 가능성이 적고 그린플레이션의 압력은 더욱 거세질 수 밖에 없어 전체적인 장기 추이는 우상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원자재 급등세는 단기적 조정을 받을수 있지만, 원자재 가격의 장기추세는 상당기간 우상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매년 제조사들의 신 모델이 출시될 때 마다 더 큰 배터리 용량을 바탕으로 늘어난 주행가능거리를 상품성으로 내세우던 그동안의 배터리 전기차 개발 방향에도 어찌할 수 없는 전환점이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기본적으로 전기차의 효율성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 없이 무작정 배터리를 키우는 방식의 문제점은 그동안 필자의 칼럼에서 여러차례 비판해 왔었지만, 어차피 돈과 정책의 논리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는 메이저 제조사들(특히 유럽의 프리미엄 제조사들)은 그동안에는 유럽식 이산화탄소 배출 계상 방식을 노리고 꾸준히 저효율/대용량 전기차를 판매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방식을 더 써먹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무작정 배터리를 키우는 것이 효율과 퍼포먼스만 떨어뜨리는 것을 넘어서서, 판매가와 생산원가에 모두 악영향을 주며 원자재와 구성품 수급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중량 차량에서의 배터리 효용 감소의 끝에 도달해 있는 모델이 최근 공개된 레인지 로버 P440e 모델이다. 전기 주행 가능거리가 48마일 (77km) 인데, 무려 31.8kWh 가용영역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전비가 2.4km/kWh 에 불과한데, 이쯤되면 전동화의 가치가 의문스러울 지경이 된다. 6년 전에 출시된 아이오닉 전기차와 비교하면 거의 1/3에 불과한 전비인데, 공차중량이 2.7톤인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레인지 로버에서는 고중량 차량에서 전동화의 효과가 줄어드는 현상에 대하여 미래에는 수소차로 대응을 해야 할 수도 있겠음에 대해서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한 바도 있다 – 수소의 스택 내구성이나 여러 문제들은 또 어찌할 것인지 싶지만.

 

2km/kWh 대의 전비를 자랑하는 레인지 로버 p440e

 

게다가 현재의 금속 가격이 유지된다면 60~70kWh 차량의 원가는 5천달러 이상이 상승할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이제까지는 업사이징을 했다면, 지금 보고 있는 차량들은 그 업사이징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부터는, 내연기관차가 오랜 기간 다운사이징을 통해 연비 향상과 주행 성능 향상의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 역사를 전동화 차량이 좇게 될 공산이 크다. 산업금속 수급, 비용, 실질적 효율성과 유지비용, 성능, ESG 측면에서의 산업금속 투입 감소의 정당성 등 모든 면에서 어떻게 하면 동일한 주행가능거리의 차량을 최소한의 배터리 용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가 해당 차량 제조사의 장기적 성패를 좌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익숙한 스토리이다. 이와 같은 효율 향상의 시도를 너무 일찍 했던 것이 BMW i3이다. 너무 일찍 피우려던 꽃이 되어 BMW의 전기차 개발은 이후 여타 제조사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가 있었고, 이 시도의 반향으로 결국 소비자가 좋아하는 것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충분한 크기와 호화로운 설비를 갖춘 대형 모델들이라는 판단 하에 많은 제조사들이 배터리 대형화의 끝까지 달려오게 된 것 같다.

 

효율성이 높은 BMW i3 은 미성숙한 시장에 너무 일찍 나왔다

 

다행스러운 점은, 모터, 배터리 패키징, 회생제동이나 전력제어를 포함한 전동 파워트레인 전반의 효율성이 선두그룹 회사에서는 상당한 속도로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바탕으로 볼 때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전동화 차량 구성이 우수성을 주목받으며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1. 동급 내연차량보다 오히려 가벼운,
소형 내연기관과 전동화
파워트레인을 혼합한 PHEV

전동/내연 양쪽 모두 다운사이징을 거친 결과물이다. C, D 세그먼트 세단이나 SUV를 플러그인 방식으로 전동화 하였을 때의 원가 상승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방법뿐이다. 최신형 전동화 차량 설계에서 얻은 노하우를 투입하면서, 소형의 엔진을 직렬식으로 연결하는 방식이 가장 단순하면서 저렴할 것이다. 아주 실패한 형태는 마쯔다 CX-60 이 될 것이고, 성공적인 설계라면 2세대 VOLT PHEV 와 후기형 아이오닉 PHEV, BMW i3 REX의 중간 정도에서 더 경량화가 이루어진 모종의 결과물일 것 같다.

 

2. 배터리 용량 60kWh 이하이면서
420km 이상을 가는 배터리 전기차

현재 이 게임에서는 테슬라가 모두를 앞서고 있다. 다른 회사들도 인지는 하고 있지만,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다. 벤츠가 전비 10을 내세운 EQXX 컨셉 모델이 예시이다. 동일한 외형 세그먼트에서 누구는 100 때려넣고 400km 가고, 누구는 60 으로 400km를 가면, 게임이 될 수가 없다. 1920년대의 차량들이 V12 8리터 엔진으로 200마력을 겨우 내던 것과, 지금은 I4 2리터 엔진으로 300마력도 내면서 연비도 나쁘지 않은 것의 차이와도 흡사하다. 결국 더 적은 배터리로 성능을 뽑아내는 것이 회사의 영업 마진까지 좌우하게 될 수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EQXX 컨셉

아마도 에너지 가격 (기름값, 전기값) 도 합리화가 되면서, 기름이든 전기든 지금처럼 펑펑 쓰기는 어렵게 바뀔 것이다. 미래의 환경 비용이 고려가 된다면 리터당 2천원의 가솔린 값도 좋았던 과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시절이 이렇게 서서히 바뀌어 가면 일단 별 문제 없이 팔리니까 나오는 지금의 과도기적 모델들, 그리고 과도기적 파워트레인 기술에 머물러 있는 제조사들은 우위를 지속하기가 점점 어렵게 될 가능성이 있다.

치우침이 한쪽 극단을 달리게 되면 반드시 되돌림이 있는 법인데, 전동화 차량의 고중량화와 배터리 대형화는 지난 수 년간 그 끝을 넘어 한참을 더 달렸던 것 같다. 그 극단의 끝에서, 세상의 형국이 바뀌며 많은 업계의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살펴볼 시점이 되었다. 사실 너무 늦었다.

 

감격한 박사
전기 모빌리티에 관한 사변(思辨)과 잡설(雜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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